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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론-마음의 수식(數式) ; 윤성문 동강병원장
언론사 울산신문 작성일 2007-10-08 조회 6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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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식(數式)

윤성문 동강병원장


 어느새 한 해의 절반이 훌쩍 넘어 올해도 3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해온 일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계획하다 보면 나의 기억을 잘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낀다. 그래서 요즈음은 좀 더 신경을 써서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꽉 채워진 달력과 수첩을 한장 한장 넘겨보면,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일들도 있고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 일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모든 기억에 눌려 살지 않기 위해 조금씩, 더 많은 일들을 잊어가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진으로, 또는 기록으로 들추어보면 좀 더 좋은 의미로 새록새록 되살아나 인생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딸아이의 책장에 꽂혀있던 <박사가 사랑한 수식(數式)>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의 주인공인 '박사'는 수학의 천재로 젊은 시절에 사고를 당하여 기억이 겨우 80분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흔히 농담으로 붕어의 기억력이 3초라서 어항에서 돌아설 때마다 새롭기 때문에 평생 어항에서 살 수 있는 거라고 하는데, 박사의 경우 인간의 관점에서 '붕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도우미 아줌마의 얼굴이 매일 마다 새롭고 80분이 지나면 했던 일들이 다시 새로워진다. 그래서 그는 메모지에 새롭게 생긴 일을 기록하여 옷에 붙여놓는다. 어제했던 일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잊혀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숫자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는 도우미의 아들에게 '루트(√)'라는 애칭을 지어준다. 루트는 '어떤 숫자이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관대한 기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사람을 기억하고,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은 박사에게 실로 전혀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기억들을 보관하지 못하는 대신 박사는 실로 거대한 숫자의 세계를 그 안에 채워 넣는다. 어떠한 숫자의 조합도 쉽게 지나치지 않고, 그것의 의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해석해 낸다. 또 젊은 시절에 사랑한 사람과 '루트'에 대한 다정한 마음의 흔적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이미 뇌 깊숙이 파고든 습관이자 본성이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5살 때의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할 때가 있다. 길을 잃고 어머니를 찾아 헤맬 때의 두려움, 대학교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늦은 밤 버스밖의 풍경. 그런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머릿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가한 저녁에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늘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기억들도 있다. 그것은 말로 분명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함', '정의', '사랑', '성실함' 등과 같은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에 대한 기억이다. 초심을 간직한다는 말은 결국 소중한 가치를 귀히 여길 줄 알던 원래의 자신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만나고, 뉴스를 보다 보면 '원래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쉽게 버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자기 입으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언뜻 보기에도 의롭지 못한 일에 결탁하기도 한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그 누구나 수많은 유혹과 뜻하지 않은 부조리에 휘말릴 수 있다. 그 속에서 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원래 뜻하던 바 대로 향할 수 있게 하는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박사가 루트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또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우리가 하루하루 쌓아가는 이 기억들 속에, 그 소박한 일상 속에 잊지 말아야 할 진리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지라도, 소중한 나의 마음을 지켜낸 그 한 순간 덕분에 인생은 온전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병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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