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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론 - 새해맞이 산책 ; 윤성문 동강병원장
언론사 울산신문 작성일 2008-01-15 조회 63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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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산책


 새해맞이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경주 반월성에 갔다. 반달처럼 생긴 성터라 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불리는 그 곳은, 자그마한 언덕을 남천(南川)이 끼고 도는 고즈넉한 곳이다. 석굴암도 유명한 해맞이 장소이지만, 올해는 고요한 마음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어서 그 오래된 성터로 가게 되었다. 천년의 이야기는 간 데 없고, 반달 성터에는 낙엽만 높이 쌓여 있었다. 천천히 그 위를 걷다 보면, 낙엽 밑에 꽁꽁 뭉쳐 있던 옛날이야기들이 고스랑 고스랑 피어오르는 것 같다.

 신라 선덕 여왕 때 지귀(志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고 한다. 지귀는 우연히 선덕 여왕이 행차하는 모습을 보다가 아름다운 여왕의 모습에 반하게 되었다. 여왕의 모습이 얼마나 인자하고 아름다웠던지, 지귀는 그날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여왕을 사모하다가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서라벌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지귀가 여왕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그녀의 행렬에 달려들었다. 신하들이 그를 막아서자 여왕은 그 연유를 물었고, 신하들은 저 미친 젊은이가 여왕을 사모하여 저리한다고 아뢰었다. 여왕은 그저 "고마운 일이다."라고 말하고 발걸음을 옮겨,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나오는데, 지귀가 탑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여왕은 잠든 지귀의 가슴 위에 금팔찌를 두고 왔는데, 지귀는 그 금팔찌를 안고 한없이 들뜬 마음에 온 몸에 불이 붙어 불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지귀 때문에 온 서라벌 일대가 불타올랐는데, 선덕여왕의 주문만이 그 불귀신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한다. 지귀는 오직 여왕의 말만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한계를 모르는 어긋난 욕망은 원래의 길을 잃고, '욕망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새해를 맞아 세우는 많은 계획들에도, '더 나은 삶'을 만들고자 하는 저마다의 욕심이 담겨져 있다. 올해는 조금 더 건강해지고,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 비록 작심삼일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한 해의 마음을 다잡는 것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준다. 그러나 목적을 잃은 과한 욕심은 오히려 고통을 주기도 한다. 끝없이 남과 비교를 하다보면, 이제껏 이룬 나의 행복한 삶을 누리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탐하게 되는 것이다. 지귀는 아름다운 선덕여왕을 사모하여, 그 마음이 불타올라 인간에게 꼭 필요한 '불'이 되었지만, 절제되지 못한 욕망은 결국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가장 필요한 것이 때론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가 있다. 파계승이 되어 속세에서 살다가 끝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도망쳐 온 제자에게, 고승은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아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라고 말하며, 밤새도록 경전을 나무판에 새기는 과제를 낸다. 올해는 때때로 나의 욕심을 줄이고 내려놓는 연습도 해보고 싶다. 나의 욕심 중 불필요한 부분들은 조금 줄이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탐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보기 보다는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이해하고 싶다.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처음의 고운 마음을 잃고 자신을 불태우지 않기 위해서는, 열정을 가지는 동시에 그 마음을 다스리는 물의 차가움도 필요할 것이다.

 올해는 새로 떠오르는 태양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산을 오르기보다는, 그저 평평한 옛날 성터에서 천천히 걸었다. 작은 언덕에 올라, 산 너머를 바라보니 보름달 같은 둥그런 어제의 해가 새로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윤성문 동강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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